2025년 11월의 어느 추운 밤, 서울의 한 카페에서 열린 다원예술 공연에 초대되었다. < 네펜데스 Nependes >라는 다소 낯선 이름의 공연이었는데, ‘곤충의 포식자’로 간주된 네펜데스는 “먹잇감을 선택하지 못하는 식충식물”로 제시되었다. “네펜데스는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삼킨다. 우리가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그와 다르지 않다”라는 설명이 시사하듯 그것은 변화된 미디어 환경과 소비자들에 대한 다소 직접적인 은유였다. 안무가이자 작가인 변가빈은 “이러한 네펜데스의 모습은 현대인의 무분별한 정보 소비, 선택 부재와 닮아있다”고 덧붙이면서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뉴스, 피드, 알고리즘이 쏟아내는 정보를 걸러내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공연은 종로 카페의 내부 기자재를 모두 제거한 평평한 공간에서 관객들과 눈높이를 공유한 상태로 이뤄졌는데, 실제로 한 장면에서 일련의 무용수들은 차려진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다가 토하는 연기를 하며 쓰러지기도 했다. 이들 뒤에 놓인 벽에서는 간헐적으로 영상이 이어졌고, 변화하는 디지털 음악에 따라 퍼포머들은 자신들의 몸짓을 변주했다.
1.안민환의 조각 작업들은 무대 양 측면과 무대 뒤편에 분산된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 Cut-Out > 연작의 일환이었는데 그중 적지 않은 것들은 자코메티의 조각들처럼 앙상한 뼈대에 가깝스로 붙은 살점과, 폭탄을 삼켜 파열된 내장/기관들의 잔해로 너덜너덜해진 병든 몸의 B급 공포 영화 속 괴물들 사이 어딘가에 길을 잃고 멈춰선 듯 보였다. 안민환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결합을 찾아야 하면서 여백과 면이 반복 교차하며 유기적으로 솟아나는 방법론을 기반으로” 삼은 것으로, “이를 통해 ‘삶’과 ‘열’에 대한 시각기호”로 기능하고 성인 남녀의 키에 준하는 “휴먼스케일을 고려한 조각들 사이에서 무용수들은 조각의 여백 사이를 거닐며 다양한 움직임”을 보였다. 퍼포먼스 장르와의 협업은 좀처럼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지만, 그에게나 관객에게나 관건은 이러한 그의 작품이 공연의 일부로 어떻게 기능했는가였다. 가령 공연의 한 인상적인 지점에서 몇몇 무용수들은, 거대한 혀를 내밀고 있으면서도 팔 다리나 머리, 혹은 얼굴과 같은 인간이나 유기체의 형상이 부재하는 뻥 뚫린 알 안팎을 드나들곤 했는데, 이 ‘몸 없는 기관들(organs without bodies)’이 ‘곤충의 포식자’인 ‘네펜데스’와 동일시된 현대인들이 게걸스럽게 삼키는 정보를 형상화한 것인지, 아니면 이 과정에서 비인간화된 인간의 분노를 시사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이 시도는 안민환의 기존 작업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일까?
2. 사실 안민환의 작업이 처음 머리에 각인된 건 2023년 < 조각모음 > 전시에서였다. ‘조각’으로 분류될 수 있는 작업을 지속해 온 작가들의 작업들의 ‘모음’과 동시에, 컴퓨터의 하드디스크(HDD) 내부에 분산된 파일 조각들을 재배치해 데이터를 읽는 속도를 향상시키고 시스템 성능을 최적화하는 작업을 가리키는 ‘Defragmentation’의 번역이기도 했던 전시 제목의 양가성이 환기하듯, 해당 전시는 조각의 전통적인 궤적을 소환하면서도 새로운 매체와 접근법과 재접속시키면서 쇄신을 모색하려는 신선한 시도였다. 실제로 조각을 영상과 디지털 스캐닝, AI 등과 명시적으로 병치시키는 작업들이 눈길을 끌었고, 안민환의 작업은 약간 달랐다. 가장 눈에 띈 건 < 범골암 5.8 개척 >이었는데, 처음엔 일반적인 조각보다 설치 작업에 가까워 보였다. 한 편에는 거울처럼 주변을 비추는 매끈한 스테인 재질로 지지대와 로프의 팽팽한 긴장에 의해 지탱되는 뒤집힌 U자형 구조물이 있었고, 그 옆에 얇고 다채로운 색깔의 석고 반죽이 일종의 얼룩이나 거대한 파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둘은 물리적으로 붙어있긴 했지만 질료의 물성이나 색채와 같은 요소들이 서로 섞일 수 없는 이질성을 응변하고 있었다. 이 둘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던 것일까? 형성과 해체 과정 어딘가에 유예된 듯한 석고 반죽의 마띠에르는 바로 옆에 배치된 곽인탄의 작업과 접점을 보이기도 했으나, 곧곧한 수직성과 ‘머리-가슴-배’로 통칭되는 인간과 동물(또는 곤충)의 골자를 선명히 유지하는 곽인탄의 군상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3.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이 작업이 여전히 작가의 취미 정도로 치부되는 ‘클라이밍’ 과정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설명이었다. ‘조각과 클라이밍’이라는 이 이질적인 배합은 곽인탄이나 그가 넓은 자장을 공유하는 앤서니 곰리와 같은 이들의 작업이 변주하는 비인간의 형상들이 극단적인 해체와 분산의 상태에서도 놓지 못하는 인간의 형상, 혹은 수직성과 긴장 관계에 놓인다. 특히 등반 과정에서 작가가 경험했다는 “자연에 압도된 무력감”은 여전히 인간중심적인 ‘정복’이나 ‘극복’, 또는 유사 신비주의적인 ‘합일’의 대상으로 소환되는 절벽이나 산의 위상과도 대척점에 선다. 가령 노해나의 글은 “조각의 오래된 주제는 ‘몸으로부터의 조각’”이며, “조각은 인간의 신체처럼 뼈대를 가지고 중력에 저항하며 기립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며, 그의 초기작에 대해 쓴 인상적인 글에서 이선영은 안민환 작업의 핵심적 특성으로 “아래로 향하는 중력감”을 강조한 바 있다. 얼마 후 박서영이 전개한 “오르고 매달리는 조각”이란 묘사는 이들과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이들 모두는 안민환의 조각 작업이 조각과 등반을 매개로 씨름해 온 ‘중력’이라는 결코 제거할 수 없는 지구의 행성적 조건을 공유한다.
4. 안민환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결정적으로 빠진 핵심 조건으로 나는 ‘엔트로피’를 덧붙이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 AI 연구의 핵심 분과 중 하나라 할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였던 노버트 위너의 인상적인 표현을 빌면, “질서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은… 증가하는 엔트로피의 나이아가라”폭포에 대항하는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싸움으로만 발생할 뿐”이라는 근원적인 의미에서.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 궁극적으로 우주의 모든 물질이 평형 상태로 수렴한다는 절멸의 시나리오로 독해되기도 하는 엔트로피를, 위너는 나이아가라 폭포의 수직적 낙하운동에 비유하고 이를 통해 중력의 비가역적이면서도 불가피한 파괴력을 강조한다. 이는 “자연에 압도된 무력감”에서 출발한 < 범굴암 5.8 개척 >이 압축적으로 구현한 형상(form)과 비정형(inform(e)) 간의 비대칭적 이질성은 물론, U자형 아치의 형상성을 그 내부에서 가깝스로 지탱하던 자일과 로프의 팽팽하지만 유연한 긴장의 위상과 합을 보다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또한 그의 ‘풍경 조각: 회화, 좌대, 조각’ 연작이나 < 캔버스, 기둥, 조각 > 연작이 때로 또 같이 씨름해 온 ‘좌대’와 ‘캔버스’와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들은 각각 대체로 깎아낸 얇은 나무 껍질이나 말린 종이, 또는 과일 껍질처럼 본체에서 떨어져 나오는 운동을 시사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이러한 비가역적 과정을 되돌리려는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를 전통적인 미술사의 시각에서, 다시 말해 조각과 회화가 20세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로댕과 자코메티, 칼 안드레나 루치오 폰타나 같은 작가들을 매개로 형성한 궤적의 연장선에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환기해야 할 ‘엔트로피’의 차원을 염두에 둘 때 이들은, 안민환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하강과 상승’, ‘흘러내림과 거슬러오름’의 이중적 벡터를 체현하는 사례로 보는 것이 정확해 보인다. < 네펜데스 > 공연에 배치된 연작은 물론, 그의 이전 작업들에 대한 묘사에서 반복되었던 ‘흘러내림’의 벡터란 가속과 감속의 정규분포로 포착된 엔트로피의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그 한 극단을 탐색하는 미래의 작업과 구분되면서도, 우주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평화와 이에 맞서는 인간의 노력이라는 차원에서 펼쳐지는 스펙트럼을 이룬다.
5.이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안민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것으로 환기된 ‘죽음’이나 ‘소멸’에 대한 관심을, 일반적인 내용이나 소재 차원의 ‘주제’와 구분할 수 있도록 해준다. < 무엇도아니지만무엇도가 능한덩어리 >나 < 일어나는 살갗, 저무는 여백 > 같은 작품들이 시사하듯, 이는 그의 작업을 ‘해체(deconstruction)’와 ‘재구성(reconstruction)’이라는 두 개의 벡터 사이에서 진동하는 역학의 일종으로 포착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가령 < Cut-Out > 전시에 대한 글에서 이지연은 안민환의 작업 세계를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펼쳐 놓은 적이 있다.
선-면-면을 분리하기-분리한 면을 세우기-세우면서 발생하는 형태를 인식하기-볼륨에 살성(flesh)을 부여하기-살 위에 다종다양한 생명을 이식하기.
여기서 관건은 안민환의 작업이 이러한 일방향적 선형성을 종종 뒤집는다는 사실을 넘어선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칫 ‘인간적인’ 차원의 사례로 오독될 수 있을 < 범골암 5.8 개척 >의 석고 반죽 조형이 3D 데이터를 활용한 산물이었다는 사실의 근원적 함의를 곱씹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 동물과 곤충, 형상과 비정형, 매끈한 스테인리스와 흘러내리는 반죽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데이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는 우리가 더 이상 데이터와 유기체로 이뤄진 양자택일의 세계가 아니라, 이 둘이 기존의 방식으로는 포섭될 수 없는 세상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런 엄격한 의미에서 안민환의 작업이 소환하는 ‘몸 없는 기관들’이나 < 구 >, < 원뿔 >, < 육면체 >와 같은 원형적 형상들은 사이버네틱스의 세계에서 “몸의 개별적 형태는… 전송되거나 수정되거나 복제될 수 있다”는 위너의 단언과도 절묘한 공명을 이룬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은 어쩌면 들뢰즈-과타리의 통찰을 계승한 스티글레르와 후이와 같은 이들이 따로 또 같이 제안해 온 ‘일반기관학(general organology)’ 시대의 조각이 아닐까? 우리의 내기가 타당한 것인지 터무니없는 사변인지의 여부는, 어쩌면 안민환의 내놓을 앞으로의 작업에 달려있을 것이다.